스크랜튼의 애오개 시약소 설립 멸절의 위기를 겪은 아현교회
아현교회 초기 역사에 관한 자료(1887~1920)
 
1887년 스크랜튼은 몇 가지 새로운 계획을 세웠다.
궁궐과 외국 공사관들이 즐비한 정동에 가난한 사람들이 오기를 꺼려했다.
그래서 정동 바깥에 병원을 세우려 하였다. 서울 사대문 밖에는 그런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의 1887년 선교 보고에 그런 구상이 담겨 있다. "서울 대문 바깥으로만 나가면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 가능하면 이런 곳에 집 한 채를 사서 음식과 의료 혜택을 주고 싶다. 곧바로 '선한 사마리아인 병원'(Good Samaritan Hospital)을 시작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는 처음에 '선한 사마리아인 병원'(Good Samaritan Hospital)을 동대문 방면과 인천 제물포에 세우려 하였다. 그러나 이 두 곳의 병원은 재정과 인력 부족으로 실현되지 못했고 정부에서도 허락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직은 선교사들이 서울 밖까지 나가 사업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정동에 여성 전문 병원이 설립되었다. 이 여성 병원은 1887년 10월에 내한한 여의사 하워드(M.Howard)에 의해 추진되었다. 아직도 '남녀유별'이 강했던 풍토에서 스크랜튼의 시병원은 여성 환자 치료 활동에 제약이 많았다. 스크랜튼도 이 점이 아쉬워 선교부에 여의사 파송을 요청하였던 것이다. 스크랜튼은 하워드는 자기 집에서 환자들은 보기 시작했는데 1년 사이에 2천여명을 진료하였다. 하워드 진료소는 점차 병원 형태를 이루어 '보구여관'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처럼 정동의 시병원과 보구여관이 호응을 받게 되자 선교부는 1887년 11월에 서울 밖 사업을 허락하였다. 그렇게 해서 1888년 가을, 서대문 밖 애오개에 집 한 채를 마련하였고 12월부터 시약소 형태로 의료 사업을 시작하였다. 애오개 시약소가 설립된 곳은 조선시대 전염병 환자들을 격리 수용하던 '서활인서'가 있던 곳이었고 가까운 언덕에 공동묘지가 있어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이 살던 곳이었다. 이곳에 진료소가 세워지자마자 환자들이 몰려들어 불과 7개월 사이에 721명을 진료하는 업적을 보였다. 스크랜튼은 정동의 시병원과 서대문 밖 애오개 진료소를 모두 맡아보아야 했고 틈틈이 하워드의 보구여관 일도 거들어 주어야 했다. 1889년 두 번째 의사 맥길이 내한함으로 애오개 시약소 일을 그에게 맡길 수 있었다. 이 시약소는 환자들만 치료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환자들과 주민을 대상으로 복음 전도도 실시하였는데 그 일은 1889년 내한한 올링거와 스크랜튼 대부인의 몫이었다. 이것이 아현교회의 시작이다.
 
1888년 12월 시약소로 시작된 '애오개' 선교는 1년만에 중단될 위기에 처했다. 스크랜튼은 1889년 내한한 맥길에게 애오개 시약소를 맡기고 그는 정동의 시병원과 보구여관 사업에 전념하였다. 그런데 맥길이 병원을 맡은 후로 애오개 시약소를 찾는 환자들의 숫자가 줄어들더니 1890년 여름이 되어서는 찾아오는 환자가 끊겼다. 이에 여름 더위가 시작되는 6월 14일 맥길은 일방적으로 시약소를 폐쇄시켜 버렸다. 이 일로 스크랜튼과 맥길 사이에 의견 충돌이 빚어졌고 둘 사이에 감정 대립이 있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애오개 의료 사업은 사실상 중단되었고 스크랜튼은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그러나 시약소로 시작된 애오개 선교는 중단되지 않았다. 1889년 내한하여 정동교회를 맡게 된 올링거가 애오개를 왕래하며 복음을 전하였고 스크랜튼 대부인도 나와서 여인들을 전도하였다. 이는 시약소를 통해 애오개에 교인들이 생겨났음을 의미하며 이들은 정동교회에 출석하면서 선교사들의 방문전도를 요청하였던 것이다. 올링거의 뒤를 이어 노블부부가 와서 2년간 '애오개 집회'를 인도했는데 노블 부인의 '오르간 연주'가 동네 주민들에게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이로써 정식 교회는 아니지만 '기도처' 형태의 아현교회가 시작된 것이다. 1894년 선교 보고는 애오개 예배처에 세례 입교인2명, 학습인 1명이 생겼음을 보고하여 독립된 교회의 기능을 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 뿌리는 애오개 시약소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올링거, 노블 등이 오래 머무르지 못하고 다른 지역으로 옮겨 감으로 애오개 집회는 자주 중단되었다. 그래서 한 때 선교부는 애오개 시약소로 사용하던 건물을 매각하여 다른 곳에서 새로 사업을 하는 방안을 연구하기도 했다. 이런 위기의 순간에 애오개에 있던 열심이던 여성 교인들이 선교사들을 찾아 가 '매일학교를 설립해 줄 것을 요청하여 그 맥이 이어졌다. 1898년 애오개에 이화학당 다음으로 서울에 여학교가 설립되어 10여명 학생이 공부를 하였고 1900년 이들을 지도할 교사로 배재학당과 이화학당 출신 부부가 왔다. 이들이 애오개에 정착한 첫 번째 사역자인 셈이다. 이후 여선교부의 재정적인 지원을 받은 애오개 매일학교를 중심으로 다시 교인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정동교회와 상동교회로 다니며 예배를 드리던 애오개 교인들이 1909년 '서문밖구역'으로 독립 구역을 조직하게 되었다.